미식가를 사로잡는 가을 제철 맛 맛 맛.
미식가를 사로잡는 가을 제철 맛 맛 맛
시사INLive | 김용철 | 입력 2010.10.16 12:13
찬바람이 불면 단풍과 함께 사라졌던 입맛이 돌아온다. 그러나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되살아난 입맛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단풍 보러, 가을 바다 보러 나갔다가 부러 찾아서
맛볼 만한 가을 음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유명 블로거 '맛객' 김용철씨를 따라가보자.
벌교의 세발낙지와 보리새우
며칠 전 벌교의 한 초장집(시장 내에 있는 횟집)에서 산낙지와 보리새우를 먹는 내내
'야만'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야만을 통해서 쾌락을 느끼는
아주 원시적 본능을 미식으로 가장하고 있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
나는 지금 산낙지를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야만을 먹는 중이다. 이 순간만은 도덕적 양심을
잠시 뒤로 감춘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그게 좋다.
![]() |
||
홍어와 멸치액젓 등으로 유명한 흑산도에 해안 일주도로라는 명물이 하나 더 늘어났다. |
보리새우는 네 마리에 1만원씩 한다. 여덟 마리를 담아왔다. 녀석을 먹을 때 사람들은
대가리부터 떼어낸 뒤 껍데기를 벗긴다. 그렇지만 나는 껍데기부터 벗긴다. 최대한 생명이
붙어 있게 말이다. 그래야 이로 씹었을 때 미세한 근육 경련과 떨림이 이에 전해온다.
보리새우의 쫄깃함과 단맛도 좋지만 나는 이에 전해오는 그 느낌이 보리새우의
'미각 1번지'라고 느낀다. 초장이 강렬해서 보리새우 맛을 죽였다. 와사비(고추냉이)와
간장을 달라고 했다. 두 번째 보리새우부터는 한결 본질의 맛에 접근할 수 있었다.
운명을 예감한 듯 공처럼 몸을 움츠린 낙지 한 마리를 집어올렸다. 세발낙지다. 아직은
어린 감이 없잖다. 열흘쯤 지나면 가격은 내리고 맛은 깊어진다. 낙지의 빨판은 좀처럼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발악도 잠시, 한손으로는 몸통을 잡고 또 한손으로는
대가리부터 쭉 훑어 내렸다. 축 늘어진 틈을 이용해 재빨리 나무젓가락을 몸통에 집어넣고,
다리를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았다. 이제 낙지는 포박 상태나 다름없다.
생각하기에 따라 잔인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는 자연의 섭리에
충실할 뿐이다. 몸통을 기름장에 찍어 입속에 넣었다. 잘근잘근 씹으면서 천천히 다리들도
밀어넣었다. 낙지의 빨판이 입속에 달라붙는다. 빨판의 힘이 셀수록 쾌감도 커진다.
얼마나 씹었을까, 낙지의 움직임도 멈추고 육즙이 혀에 전해진다. 짠맛부터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단맛이 흐른다.
![]() |
||
ⓒ김용철 제공 보리새우는 대가리보다 껍데기부터 떼어내야 더 본질적인 맛을 즐길 수 있다. |
전장에서 승리한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과 함께 전리품을 챙긴다. 나에게 전리품이란 소주 한잔이다.
승자의 여유와 함께 소주 한잔을 털어넣었다. 야만과 쾌감을 감추면서….
전남 보성 벌교역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수산물점이 즐비하게 서 있다. 아무 집이나 골라서
낙지나 주꾸미, 보리새우 등을 구입하고 초장집을 알려달라고 하면 된다.
자연산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
찬바람 불면 꼭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추어탕 한 뚝배기 생각이 간절하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각나는 음식이 달라지는 것 또한 음식이 자연의 일부여서이다. 내 어린 시절에는 미꾸라지를
식재료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양식 미꾸라지는 듣도 보도 못했다. 강물에 들어서면
밟히는 게 미꾸라지였다.
지금이야 귀하디귀한 자연산 미꾸라지지만 잡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미꾸라지보다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잡기도 수월한 빠가사리(동자개)에 입맛이 더 쏠렸기 때문이다.
돌 밑에 손을 넣어 잡은 빠가사리를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는 빠가사리탕을 칼칼하게 끓이셨다.
푹 익힌 빠가사리를 갈아서 갖은 양념을 넣고 끓인 다음 막바지에 깻잎을 채썰어 넣었다. 그 맛이란….
지금 누군가가 최고의 추어탕과 바꿔 먹자고 한다면, 아마 100그릇과도 바꾸지 않을 맛이었다.
빠가사리탕은 '뭍천어'와 함께 내 인생 최고의 민물 요리에 등극해 있을 정도이다. 뭍천어라는
말의 뜻은 육지란 뜻의 '뭍'과 내천(川) 그리고 물고기어(魚)자가 결합한 말이다. 뭍천어가 발음하기 좋게
'무천에' '물천어' '물천에' '물처네'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냇가라는 것이 육지에 있으므로 뭍은
굳이 쓸 필요가 없는데 쓴 이유는 바닷물고기와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추론된다. 따라서 뭍천어는
피라미 같은 민물고기를 두툼한 무와 함께 끓인 탕으로 요즘의 매운탕과는 차원이 다르다.
![]() |
||
ⓒ김용철 제공 추어탕은 자연산 미꾸라지를 푹 삶아서 간 다음 된장·고추장을 풀어 만든다. |
성인이 되어 추어탕으로 눈을 돌렸다. 빠가사리탕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날 샐 것 같아서였다.
추어탕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도시의 추어탕은 왠지 미덥지 못하다. 그래서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
결단을 내렸다. 추어탕을 직접 끓여보겠노라고. 문제는 미꾸라지다. 업소의 추어탕이 못 미더워
직접 끓이기로 한 마당에 시장에서 파는 미꾸라지를 쓸 수는 없는 일. 다행히 시골 재래장에서는
상인이 직접 자연산 미꾸라지를 잡아 팔기도 한다.
미꾸라지는 푹 삶아서 간 다음 된장과 고추장을 분량만큼 넣었다. 삶은 시래기도 적당히 잘라 넣었다.
홍고추 물과 마늘, 토란대, 숙주도 넣었다. 깻잎은 채썰어 넣고, 파도 숭덩숭덩 썰어넣었다.
들깨 물도 부었다. 불을 내리기 전에 부추를 넣었다. 부추는 미꾸라지에 많은 콜라겐을 우리 몸이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실을 한다. 자, 이제 한상 차리면 된다. 후배들을 불러놓고 추어탕
잔치를 벌였다. 맛이 어땠냐고? 추어탕을 먹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추어탕을 먹을 때 빼놓으면 안 되는 향신료가 있다. 초피다. 추석 무렵 남도 시골 재래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직접 채취한 초피를 구할 수 있다.
죽변의 물렁가시붉은새우
며칠 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산 새우를 보았다. 한 횟집의 수족관에 새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 새우철이 돌아온 걸 보니 가을이구나 싶었다. 미각을 추구하는 사람들 특성은 계절의 변화를
제철 음식에서 체감한다.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대하도, 보리새우도 아닌 흰다리새우였다.
양식 조건이 좋아 많이 키우는 종이다. 물론 일반인들은 대부분 업소 말만 믿고 대하나
보리새우인 줄 알고 먹지만 말이다.
이처럼 새우는 같은 듯 다른 경우가 많다. 서해안에 보리새우와 대하가 있다면, 울진의 죽변에도
대하가 있다. 물론 서해안의 대하와는 다르다. 일본에서는 '버튼새우'로도 불리는 종인데,
복부에 붉은 반점이 단추처럼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 사람들은 '대하'라고 부른다.
실제 큰 새우는 서해안의 대하 못지않게 큼지막하다. 자라면서 수컷에서 암컷으로 변하기 때문에
몸집이 큰 놈들은 대부분 암컷이다. 귀한 대접을 받는 새우다. 다만, 어획량이 적기에 미식가라도
그 맛을 모르는 이가 많을 정도이다. 크기가 있다보니 씹는 질감이 도드라진다.
죽변에서 나는 새우로는 물렁가시붉은새우가 대표적이다. 일명 꽃새우라 불리는 종이다. 오도리라 불리는
보리새우는 산 채 먹지만 물렁가시붉은새우는 죽은 게 더 달달하다. 물론 식감은 약간 물러지지만
그 때문에 일식집에서는 죽은 새우를 더 선호한다. 닭볏 모양을 한 새우는 닭새우라고 불린다.
기세등등한 생김새만큼이나 잔뜩 약이 오른 자세를 취하는 게 특징이다. 다른 새우처럼 팔딱거리지도 않고
부동자세를 취하는 게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이다. 육질이 단단해서 닭새우만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구워서 먹는다.
울진 죽변 수산물시장이나 제일수산에서 구입할 수 있다.
목포에만 있는 맑은 뼈다귀탕
뼈다귀탕은 뼈해장국·감자탕·뼈다귀해장국 등 다양하게 불린다. 도시의 뼈다귀탕은 목포에서 먹는 맛에
근접하지 못한다. 이는 원재료의 차이 탓인데 바로 수입산과 국산의 차이이기도 하다. 또 냉동과 냉장의
차이이기도 하다. 필수적으로 수입산은 유통기한이 길어 신선도 하락이 불가피하다. 반면 국산은 반대이다.
표면적으로는 냉동과 선도의 차이뿐으로 보이지만, 좀 더 파고들면 앞으로 뼈다귀탕을 먹는 데 상당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수입산 냉동 뼈를 조리하려면 해동이 필수이다. 이 과정에서 육즙이 상당량 빠져나간다. 좋지 못한 냄새도 난다.
이 같은 단점들을 보완하려고 과도한 양념과 자극적인 맛을 더한다. 뼈해장국마다 과하게 들어가는
들깨가루는 역설적으로 재료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점은 또 어떤가? 물컹한 살점에서는
고기의 풍미가 전혀 안 난다. 다만 자극적인 양념이 스민 고기 아닌 고기를 먹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입 뼈로 만든 해장국은 한마디로 고기나 고기 국물을 먹는 게 아니라, 고기를 가장한 양념
국물을 먹는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뼈다귀탕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목포역 오른편에 있는 해남집의
뼈다귀탕은 단연 압권이다.
![]() |
||
ⓒ김용철 제공 목포 뼈다귀탕의 뼈는 신선하고, 적당한 육즙이 구수하다. |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냄새부터 다르다. 아, 이 냄새! 그래, 딱 이 냄새다. 내가 늘 그리워한
뼈해장국 냄새. 냄새만으로도 맛이 그려진다. 드디어 뼈다귀탕이 나왔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비주얼이다. 스테인리스 대접에 곰탕 같은 맑은 국물은 딱 내 취향이다. 허름하고 작아 1인이 운영하는
가게지만 찬을 담는 식기가 사기로 된 것 또한 점수를 땄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차림도 그렇고.
뼈다귀를 입에 물었다. 갈비탕의 갈비를 먹는 듯하다. 적당한 쫄깃함과 육즙, 구수한 풍미가 그렇다.
이런 맛은 도시의 뼈해장국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목포에 가야 맛볼 수 있다.
수입산 뼈는 대부분 등뼈지만, 목포 등지에서 파는 뼈다귀탕에는 관절뼈가 더 많이 들어간다.
흑산도의 멸치액젓, 멸치젓
흑산도에는 홍어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 맛있고 제대로 만든 멸치액젓이 있다고 하여 섬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서너 시간 걸리던 뱃길이 쾌속선이 뜨면서 두 시간 만에 당도했다. 흑산도는 섬이지만 울창한 산림을
자랑한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짙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기까지 해서 흑산도라는 지명이 붙었다던가.
![]() |
||
흑산도의 멸치액젓과 멸치젓은 자연과 정성만으로 삭힌다. |
홍어와 < 자산어보 > 가 탄생한 정약전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흑산도는 내륙 관광이 인기이다.
해안 일주도로가 개통되어 손쉽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관광버스와 택시를 이용하는데 택시는
약 7만~10만원만 지불하면 두 시간여에 걸쳐서 푸르디푸른 바다와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예리(소사리)를 가로지르는 개천의 물은 오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김관철씨에 따르면,
목마를 때는 바로 입을 대고 마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청정한 마을에서 멸치젓이 곰삭고 있다. 맛을 보니 그리 짜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염도는 24~25%인데 이보다 높으면 짜고 낮으면 좋지 못한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시중에서 파는
젓갈 중 T-N(총질소 함량)이 기준치인 1%도 못 되는 것들이 많다. 또한 부족한 질소 대신 여타 첨가물을 넣어
맛을 내는 젓갈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젓갈은 주재료인 멸치와 천일염 외 첨가물을 일절 배제한 채
자연과 정성만을 더해 삭힌 것이다. 제대로 만든 멸치젓이 있기에 올겨울 김장 걱정은 조금 던 듯하다.
흑산도 멸치액젓은 대상수산(011-649-0583)에서 구입할 수 있다.
출처 : 김용철 (맛 에세이스트)
-방화동 서당 훈장 오 치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