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가 되니 어김없이 이슬람교도 들의 기도 소리가
교회 지붕위 확성기를 통해 흘러 나온다,
첫날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굴 했었지만
여기와서 두번째 들으니 그것도 익숙해져간다.
6시에 모닝콜인데 그노무 기도 소리에 잠을 설치고
짜증으로 푸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 나라 같으면 저교회는 벌써 민폐로 신고혀서
폐쇄 됬을 끼구먼---.
한국에서 오기전 뉴스에서 이짚트를장악하고 있는 군부에서
데모하는 군중들에게 발포혀서 민간인 두명이 죽었는데 대해 방송 하였으니
제대로 여행을 할수있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생겼다.
나는 실제로 아스완의 아부심벨이 있는 상품을 선택했었는데
아스완댐을 만들면서 람세스 2세의 대신전과
부인 네프타리의 소신전이 물에 잠길 참이였는데
세계 각국에서 성금을 내어 지상 60여 m로 옮겼던 곳을
살펴보는 상품인데 대략 60만원정도가 비싸다.
그래선지 모객이 않되고 지금 내가가는 이상품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상품도 28명까지 모객 됬었는데 아스완 상품이 아니기에 다들 포기하고 19명이남았는데
우리 부부를 포함시켜 겨우 마지노선인 21명이 되어 출발할수 있었다.
인류 5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져다 놓은 여기 이짚트 고고학 박물관---
선사시대부터 신왕국을 거쳐 그레코로만 시대 초기까지의 유물
10여만점과 투탕카맨의 황금마스크 를 비롯해
25만 여점이 살아 숨쉬는곳이 여기 고고학 박물관이다.
그옛날 왕가의계곡에서 수많은 무덤들이 도굴됬는데
여기 투탕카맨 무덤이 젤로 꾸져서 또 보잘것없는 왕이라고 소문이 나서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 하는데도 여기서 발굴된 유물만도 25만여점 이라니
도데체 그화려한 람세스2세의 무덤에서는 얼만큼의 유물들이 발굴됬을까?
또 세티1세의 무덤에서는 얼마나 화려한것들이 쏟아졌을꺼이남?
모든게 아리숭한 미스테리 같은 이바구인데도 그것들이 실제인것을---.
박물관 정면에는 스핑크스두개가 나란히 놓여있고
둘다 코와 수염이 망가져 있었다.
정면에는 上 이짚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와 下 이짚트를 뜻하는 연꽃이있는 연못이 있는데
이꽃들은 통일된 이짚트를 뜻하며 연못에다 심어놨단다.
표를끊어 입장하니 모든 유물들을 마구 풀어 헤쳐놓은듯한 느낌이였지만
시대별로 잘 구분은 돼있었다.
투탕카멘 (이집트 왕) Tutankhamen.
사진으로만 눈에 담았던 투탕카멘 !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기원전1320년 에 맹그러진것 치고는 너무나 초현실적인 기술을 초월하고 있었다.
*너무도 유명한 황금으로 된 투탕카맨 마스크*
바로 황금마스크 라는 파라오의 저주를 맹그런 젊은 나이에 요절한 투탕카맨 이바구라는건
어릴적 황금마스크를 쓰고 전쟁놀이 칼싸움을 추억으로 생각하는
청년의 나이쯤에서야 알게됬던 그주인공을 오늘 더뎌 상봉하는 순간이다.
*상 이짚트랑 하이짚트를 표하는 여인상*
고대 이짚트인들은 황금마스크 이러한 象을 만들때도
실제 인물과 같아야만이 영혼이 찾아올수 있다고 믿고 있어선지
투탕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는 어린 앳띤 동안의 모습이였다.
111 kg 황금관 안에 고히 잠든 투탕카맨 왕,
*투탕카맨이 고히 잠들었던 111k 황금으로 만든 관*
그는 3000 여년전 9살에 왕이되어 10여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어린 나이로 요절한 왕이다.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자는 천벌을 받게 되리라" 한때
파라오의 저주라고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파라오의 저주 괴담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이들이
무덤 입구에 '왕의 사후 안식처를 침입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문구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면서 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그만큼 누구의 손길도 허락치 않았다.
나는 여기 투탕카맨 하나만을 보고도 인간의 예술적 능력과
예술의 발달과정을 능히 짐작 할수 있었다.
정말 가서 볼만한 가치가 있고 느껴 볼만 하다는 말들을 되새기며
와서 본 것은 한마듸로 놀랍고도 압도당하는 그무었이 내가슴을 짓누루고 있는것만 같았다.
아쉬웁게도 안에서 사진을 찍지못해서 너무나도 앵통했다.
촬영금지의 아쉬움을 밖에서 몇개의 사진을 구할수가 있어서 다행이였다
아무턴 박물관의 유물 한점 한점을 다 관람할려면 하나에 2분씩만 계산해도 160여일
그러니까 5개월이 넘게 걸린다는거다.
그러니 미리부터 도서나 인터넷으로 많은 공부를하고 가야만이 도움이될것이다.
화려한 색체감으로, 아니 내평생에 한번이라도 만져볼수 없을꺼 같은 황금 111k --
내맘을 짓누르는 그어떤 압박감으로 그옛날 파라오들의 고풍생활을 더듬으며
아기예수 피난교회로 발길을 돌린다.
번화가를 벗어난지 채3분정도였는데 엄청 후진 마을의 골목길로 접어든다.
곳곳에는 쓰레기 더미에 사람이 함께 살고있는듯,
아니 쓰레기더미속에서 살고있는듯하였다.
지나는 길에는 한가로이 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이바구가 있고
오고가는 한적함도 었볼수가 있었고,
아낙들의 전통 시장보는 모습도 볼수가 있었다.
또 마을 아저씨들의 물담배를 물고 있는모습도 한가로워보였고
예수 피난교회를 보고있노라면
갑자기 동방박사 3분이 갔었던 예루살램으로
돌아간것같은 착각이 인다.
꿈에 요셉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계시로
이곳까지 피해왔을 요셉과 마리아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예수님 가족이 헤롯의 음모를 피해 애굽으로 갔는데,
그 피난의 노정을 살펴보면
베들레헴을 떠나 - 라파 - 엘아리쉬 - 파루지움을 거쳐 애굽으로 갔다.
거기서 나일강을 거슬러 엘우하라크 까지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곱틱교회의 여러 자료와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근거한 것이다.
아기예수 피난교회의 천정은 노아의 방주모양의 배모양이다.
*모세기념교회 실내사진 (몰래 찍었음)*
지하동굴은 아기예수 가족들이 100여일간 숨어지냈던 곳이다.
그곳은 출입이 통제되어 갈수가없었다
그옆에는 모세기념 교회인데 모세가 출애굽하기전
마지막 기도하던곳으로 지금은 유대교회당으로 사용되는곳이다
아기 예수 피난 교회는 AD 303년의 로마 황제 맥시밀리안 때에
시리아의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서지우스(Sergius)와
바쿠스(Bacchus:그리스 신화에는 酒神,박카스이기도함)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며,
매년 6월 1일에는 이들 성인의 축일을 지키고 있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 의 현재 건물은 AD 10~11세기에 재건한 것이다.
이교회는 예수님일행이 100여일간 피난생활을 하였던 동굴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정소이기도하다.
이건축양식은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써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통로)를 가지고 있다.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고 원주 부분이 검게 그을린 흔적들을 볼수 있다.
기둥중에서도 화강암으로된 다듬어 지지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자칭하기도 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the Crypt)은 현재 나일강물에 잠겨있고
그들어가는 입구는 예배당 맨 왼쪽의 성소안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6월1일이 축일로 지켜지고 있다.
*예수 피난 교회를 들어서며*
"저희가 떠난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마리아)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 하신바
'애굽에서 내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3~15)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자가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땅으로 들어오니라
(마 2;19~21)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 생활.
애굽(한자로 이짚트를 애굽이라함) 체류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6개월~7년까지를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예수님은 헤롯이보냈을 자객과 이방인들의 위협이라는 어려움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만 하였다.
예수님의 이집트 체류에 관한 성경이야기는 이집트 곳곳에 스며있다.
나일 삼각주와(델타) 나일강변에 있는 수많은 유적지들은 가족들이 숨어서 쉬기도 하고
그들스스로를 정결케 했던 그런 장소들로 알려지고 있다.
이집트의 인기있는 여신인 이시스 가 적으로부터 그의 자식을 보호한이야기와
동정녀가 헤롯을 피해 예수와 도망한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은
시컨둥 하게 여겨온 수많은 유적지들이 있기때문에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고한 종교 사회는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훨씬더 오랜 전통과 더불어 기독교와 맺은 친밀성때문에
기독교를 기꺼이 채택 하기 쉬웠다고 할수 있으며
이것이 이집트 기독교의 현재의 특징을 대변해주고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피난교회까지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에
찍을수있는것만 찍고는 대사관에서 제공하는 사진으로 대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수피난교회를 나와 바로옆이 모세 기념관이다,
*아기예수 피난교회(몰래 찍었음)*
*천정이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된 아기예수 피난교회 (몰래 찍었음)*
*모세 기년교회를 나오며*
세계에서 젤로 크다는 이슬람교의 핍박아래 하나뿐인 목숨마져 받쳐가며 지켜온
기독교의 순교 정신들을 보며 그들의 신앙에 그림자조차 흉내낼수 없는 자신을
애써 감추려 들지만 묵직하게 닥아오는 죄책감은 내맘을 억누른다.
다시 김가네라는 한인 식당에서 된장과 미역국이 있는 오찬이 준비된단다.
-방화동 서당 훈장 德山 오 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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